LOUISVILLE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 (NCKPC) 연례회의 폐회 예배에서 노래한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은 저의 영혼을 깨우고 사랑의 기억을 되찾아주고 사랑의 열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는 어린 시절의 신뢰와 기쁨을 되찾게 하여 주신 하나님 어머님이셨습니다.

한국어 단어는 영어 단어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리키지만, 저는 부끄럽게도 한국 복음성가와 노래들, 심지어 한국어를 창피해한 시기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열 두 살 때, 할아버지가 뉴욕 플러싱에서 우리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한국어를 배우고 토요일 한국 학교에 다닐 것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만화 그림을 그리다가 돌아왔습니다. 저는 한국어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익숙한 영어에 비교하여 외국어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저에게 한국어를 쓰지 말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아시아인들을 가리켜 "눈이 찢어진 중국인들"과 같은 인종적 혐오감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ESL영어 선생님이 "r"과 "l"을 구분하기 위해 저의 발음을 고치려고 할 때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저에게 이득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서툰 영어에 한국어를 섞어서 좌절감을 설명하려고 했을 때 가장 문화적이고 진보적인 어른들이 다른 곳을 쳐다봄에서도 그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으로 마음을 내면화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가 그 어떤 것보다 더 낫다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영어로 하는 철학은 더욱 심오합니다. 영어로 하는 과학이 더 진실입니다. 영어로 된 시가 더 아름답습니다. 영어 설교는 2급인 한국어 설교보다 더욱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영어로 된 복음성가는 더욱 영적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문화에 편견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메이시에서 쇼핑을 하시며 엉터리 영어로 가격을 흥정하기 시작하실 때 그녀와 같이 있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녀 뒤에서 몇 걸음을 떨어져서 다녔습니다. 지금도 나이 드신 한국 사람을 만날 때 공개적으로 어떤 말을 하실까 잠시 걱정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치밀하게 짜인 비판적 필터와 권력이 문화적 가치를 왜곡시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 기본 설정은 내 자신의 문화에 맞춰 확고하게 설정됩니다. 저는 바로 하루 전에 수정한 저 자신의 편견을 포함하여 항상 끊임없이 고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NCKPC 예배 도중, 저는 잠시 편견 없는 저 자신을 경험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자장가와 찬송가를 불렀 주셨던 한국어가 항상 내 정체성의 기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엄마와 아빠라고 말했던 말은 어린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자기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첫 단어입니다. 이것들은 아이에게 세상을, 그리고 아이 자신에게 주는 단어입니다. 저는 호텔에서 3일간 만난 사람들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편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같은 문화의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들, 사람들의 역사와 방식을 담은 언어를 상속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본 회의에서는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저는 "이중 의식"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한국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통성기도를 크게 외쳤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세 번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저는 그런 식으로 기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조작적인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에게 그것이 다르게 들립니다. 그것은 예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단지 소리가 클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예전과 마찬가지로 불성실하면 그것은 불완전하고 제한적이 됩니다. 잘 진행되면 그것은 자유롭고 연합을 이룹니다. 그것은 세상, 세계교회, 그리고 우리 교단을 향한 더 크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저의 부모님들의 폭포수 같은 열정으로 성전을 가득 채우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기도에서 그들은 훼손된 것을 고치시고 남북한을 다시 한 가족이 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간원하였습니다.

소수민족으로서의 상처는 예언적 민감성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얻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비판적인 눈을 갖게 됩니다. 권력의 중심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서로의 팔을 연결하여 만드는 원처럼, 흔들리지만 실행 가능한 균형은 센터없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 다른 문화나 다른 언어를 배우는 데 시간을 전혀 쓰지 않는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장님이 될 수 있습니다 - 이것은 더욱 비극적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중심으로 믿습니다. 거만Hubris은 실명의 증상입니다. 우리가 단 하나의 문화와 언어로만 예배한다면, 우리가 언제 우리의 문화로 그리스도를 찬탈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마치 물속에 있는 물고기에게 물에 있다고 말함과 같이 쓸모 없을 것입니다.

몇 년 전 부모님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하여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뉴욕으로 운전하였습니다. 저는 주유소에 둘렀습니다. 그리고 계산대 뒤의 나이가 지긋한 여성분과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희끗한 흰 머리카락으로 허약해 보였지만 불같은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짧은 대화로 우리는 둘 다 그리스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몇몇 선교사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알래스카 원주민 소녀와 결혼했고 그녀가 그들과 얼마나 행복한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고래 고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녀는 노력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기독교인" 일지언정 집마다 토템 기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바로 앞 카운터 위에서는 부풀린 산타 클로스 머리들이 웃는 얼굴로 부단하게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손사무엘 목사는 장로교 선교국의 다양성과 화해 담당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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