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 이후 4년 만인 1963년 1월, 전국 선교부 히스파노 아메리카노(Hispano Americano)의 이사회 의장인 도널드 해리스(Donald Harris)는 쿠바로 2주 간의 여행을 가졌으며 섬 전체의 회중을 방문하고 많은 목회자, 직원, 및 교회 교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해리스는 쿠바의 장로교회 교인들의 교회와 선교 사업이 번성함을 보고하며 그들이 "심오하고 두려움이 없는 영적 삶"[1]을 찾았으며, 출국 허가를 얻었으나 교회를 위해 계속 일하기 위해 쿠바에 남을 계획이었던 많은 장로교인들을 소개하였다.

미국장로교회가 쿠바장로교회에 대한 오랜 지지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반영하는 상황에 대한 이 스냅 샷은 수천 명의 장로교인들이 직면한 복잡하고 열악한 결정을 전달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바티스타 독재 정권, 혁명, 카스트로 정부의 공산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살아 남은 사람들을 말한다. 장로교 역사학회(Presbyterian Historical Society)는 그의 교회와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 머물러야 하는 엄청난 선택과 씨름을 하고, 아내와 어린 딸들과 함께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분주하였던 목사출신인 어느 쿠바인의 미출판 회고록을 보유하고 있다.

"악몽의 회고록"

마뉴엘 로드리케즈 Manuel Rodríguez는 비야 클라라Villa Clara 지방의 카리바리엔Caibarién에서 자랐다. 만탄자스Mantanzas의 복음주의 신학교를 졸업 한 후, 그는 1950년 쿠바 노회에 의해 안수 받았다. 뉴저지 대회의 일환인 쿠바 노회는 스페인-미국 전쟁 이후에 시작되어 홈Home 선교부(후에 전국 선교부가 됨)에서 운영되는 미국장로교의 초기 선교사업에 기원을 두고 있다.

Rodríguez는 1968년에 완성된 "악몽의 회고록"에서 혁명과 초기 낙관주의에 대한 자신의 경험 - 카스트로가 전복한 Fulgencio Batista 체제의 박해로부터 새롭고 자유롭게 된 쿠바의 가능성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1959년 6 월, 로드리게스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쿠바를 떠났다. 쿠바와 미국에있는 친구들은 신학석사 학위를 마친 후에 미국에 남아 있으라고 충고했지만 로드리게스는 자신의 입지가 쿠바에 있다고 느꼈다.

만탄자스Mantanzas의 복음주의 신학교 —장로교 역사학회

그는 향후 2년 동안 혁명의 개혁이 쿠바교회의 활동을 침범하고 교회 지도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분열이 심화됨에 따라 경각심과 불안감이 커지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는 점차적으로 그가 "정권의 의지에 항복하는 대신에"[2] 교회에서 계속 봉사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962년 4월 쿠바 노회에서 로드리게스의 요청에 의하여 그와 노회의 관계는 해소되었다. 미국에 있는 친구와 전국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1962년 9월 그는 하바나를 떠났고 제일 스페인 장로교회 목사인 에르네스트 소사 Ernest Sosa 목사가 마이애미에서 그를 마중하였다.

Rodríguez는 미국과 옛 친구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는 기쁨을 전하며, 처음부터 다시 삶을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이전에는 동등한 입장에 있었던 동료들로부터 이제는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난민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인식했다.

Rodríguez는 마이애미, 뉴욕, 및 뉴저지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뉴저지 주 플레인필드(Plainfield)에있는 Crescent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부목사직을 얻었다. 미국에 도착한지 한 달도 채 안되어 뉴저지 대회 연례모임에 참석하여 쿠바의 종교자유에 대한 생각을 동료들과 공유했다. 그로부터 1주일 만에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TV 방송을 통하여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했다고 발표함을 보게 되었다.

Rodríguez는 1970년대 중반까지 Crescent Avenue 교회에 남아있었다. 그는 플로리다와 일리노이에 있는 교회에서 잠깐 봉사한 후 뉴 멕시코 주 앨버커키의 제2연합장로교회의 목사로 부름받아 2000년 은퇴할 때까지 봉사했다.

추가 정보 :

다음 기사는 쿠바장로교회와 미국의 미국장로교회에 관한 추가 역사를 제공하고, 쿠바교회의 직원과 선교를 계속 지원하기 위한 전국 선교부의 노력, 그리고 장로교회가 참여한 쿠바 난민의 받아들임 및 재정착에 관한 것이다.

Theron Corse, "혁명에서의 장로교인: 미국 선교 교회와 카스트로의 쿠바 도전, 1959-1970." 쿠바 연구, Vol. 31 (2000) pp. 1-33.

Karla Ann Koll, "홈Home 선교지에서의 화산 혁명 :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쿠바 혁명에 대한 대응."Journal of Presbyterian History, Vol. 82, No. 3 (2004년 가을), pp. 149-68.

1962년 뉴왁 공항의 쿠바 난민. 굿 뉴스 라디오(Good News Radio)의 1962년 마이애미로부터 뉴왁(Newark)에 정착한 쿠바 난민 도착 라디오 방송이다. 난민 배치에 대한 간단한 인터뷰가 포함되어 있다. 유진 카슨 블레이크 (Eugene Carson Blake)의 말로 결론된다. 여기를 누르면 들을 수 있음.



[1] Mildred Hermann, “Churchman Reports on Recent Visit to Cuba,” Presbyterian Life, April 1, 1963, pp. 29–31.

[2] Manuel Rodríguez papers (“Memoirs of a Nightmare,” unpublished manuscript [1968] ARCHIVES 05 0613 SPP 60] (quotation p.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