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총회 “A.D.” 매거진 포토 파일(84-0111)의 세자르 차베즈의 모습

1974년 총회 “A.D.” 매거진 포토 파일(84-0111)의 세자르 차베즈의 모습

1972년, 펜실베이니아주 베들레헴의 그리스도 연합교회의 프레드 아이스터는 교회에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의 농장노동자 연맹(UFW)에서 사역하기 위해 간다고 말하고 떠났다.

 

프레드와 수는 전국 교회 협의회(NCC)의 후원하에 농장 노동자들과 동행하는 전국 농장 노동자 사역 (NFWM)에 참가하는 열 여덟 번째 부부가 되었다. 이들 부부는 무료로 노동자들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들에서 일하며,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일을 도왔다. 한편 이들은 최저 임금을 받으며 교외에 거주하는 중산층의 삶을 포기했다.

 

캘리포니아의 농장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역경과 세자르 차베즈의 카리스마, 그리고 그가 조직한 라카우사 운동은 편안히 살 수도 있었던 임명직 목회자들을 나라를 가로질러 아주 다른 삶으로 이끌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NCC 소속 교회들은 UFW를 후원했다. 아이스터는 회중에게 말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고, 행진하고 또 많은 편지를 썼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주장해온 것들을 몸소 실천할 수 있습니다."

1973년 총회에서 미합중국 연합장로교회(UPCUSA)는 상추와 포도의 재배에 대해 UFW가 시도한 보이콧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듬해, 차베즈는 루이빌에서 열린 제186회 총회에서 연설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장로교 평신자" 라는 간행물은 차베스의 등장에 반대하고 차베스에 대항할 연사를 찾기 위한 총회 대의원 그룹의 노력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정서기 윌리엄 톰슨에 의해 무산되었다.

 

10분 동안, 차베스는 농장노동자 조합에 대한 교회의 지원에 대해 총회 대의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비폭력에 대한 공동의 약속에 대해 말했다.

참석자 중 일부는 지난 8월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코첼라 밸리에서 있었던 충돌과정에서 운송노동자 연맹이 UFW 피켓을 들었던 사람들을 공격했던 사건 이후, IBT(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에 대한 차베스의 발언이 모욕적이라며 화를 냈다.

 

"세자르, 우리중에 재배자뿐 아니라 운송노동자가 있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든 연합 장로교인들이 라카우사를 확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요?"라고 낸시 그리핑은 "A.D." 매거진에 썼다.

1974년 8월,

1974년 총회는 1973년의 보이콧을 연장하기 위한 헌의안을 부결하고 "경제적 정의를 얻기 위한 소규모 재배자들의 노력을 지원"하고 "화해를 위한 노력"으로 헌의안을 대체했다.

 

일부 총회 대의원들은 불만을 쏟아내며 1960년대 이후 차베즈와 UFW와 줄곧 함께 활동해온 장로교 목사인 크리스 하트마이어의 연설을 갑작스레 거부했다.

 

하트마이어 목사는 1961년, 캘리포니아 이주민 사역에 참여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이주했다. 1962년, 차베스와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 델라노로 이주하여 농장 노동자를 조직하고, 마을과 목장을 방문하며, 전국 농장 노동자 협회(NFWA)로 알려진 작은 규모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1965년, 대부분이 필리핀계인 농업 노동자 조직 위원회의 구성원들은 갑자기 일터를 떠나 멕시코계 미국인 동지들에게 그들과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 NFWA는 차베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파업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차베즈는 하트마이어와 캘리포니아 이주민 사역에 파업 노동자들을 지원하도록 요청했고, 그때부터 장로교와 라카우사 사이의 유대가 형성되었다.

1975년, “A.D.” 매거진 포토 파일 (84-0111)의 캘리포니아 농장 노동자들

1975년, “A.D.” 매거진 포토 파일 (84-0111)의 캘리포니아 농장 노동자들

전국적인 행동이 없다면 캘리포니아 농장 노동자의 투쟁은 실패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하트마이어 목사는 전국 장로교 강단에 이 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1970년, 장로교와 회중파교회가 공동으로 일으킨 이 새로운 시도는 전국 농장 노동자 사역이 되었다. 하트마이어 목사는 1980년 UFW에 전업으로 사역할 때까지 라카우사에 기독교인들의 관심을 계속해서 결집하였다. 이후 그는 바톤을 아이스터에게 넘겼다.

 

UPCUSA의 교단 직원들은 이러한 사회 정의에 관한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에 대한 다양한 분노의 표현들과 씨름해야 했다. 펜실베니아주 아폴로의 R. H. 앤키니는 1974년, 정서기였던 톰슨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포도가 먹고 싶으면 그 어느 포도도 기어코 먹고야 말겠소. 날더러 먹지 말라고 하지 마시오! 절대로!!! 내가 보기에는 로데시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상황도 멀리해야 하오. 우리 돈의 상당액은 NCC와 WCC, 그리고 아프리카와 다른 나라들의 게릴라 부대를 지원하는데 쓰이게 될 것이오 (그렇게 읽고 들었소.)"

 

1974년 총회 표지에서 잡지 "평신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처음부터 세자르 차베즈와 가까운 동료였던 하트마이어는 전국 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의 전국 농장 노동자 사역 책임자로 연합 장로교회는 1973년 NFWM에 $1,985,046를 기부했다.”

 

캘리포니아주는 궁극적으로 농장 노동자 조합 선거에서 공정하고 비밀을 유지하는 투표를 보장하기 위해 농장 위원회를 설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76년에 샌 호아킨 밸리의 재배자들은 성공적으로 의회에 농장 위원회의 자금 지원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썬메이드 건포도와 썬스위트 자두에 대한 전국적인 보이콧을 촉발했다. 하트마이어와 NFWM은 차베즈 및 UFW와 함께 농장 위원회에 대한 기금을 복원하기 위한 주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을 같이 했고, 가을에 목표를 달성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약 4만명의 노동자가 UFW를 통해 노조의 보호를 받았다. 차베스는 1993년 4월 사망했고 4만명 이상 사람들이 행진하며 그를 애도했다. 미국 농장의 정당한 이민 정책, 공정한 급여 및 살기 좋은 근무 조건을 위한 투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