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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ators Harold R. Martin and Robert N. Montgomery shake hands during the march celebrating the union

총회장 해럴드 R. 마틴과 로버트 N. 몽고메리가 통합 축하 행진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1958년 5월 27일, 장로교인들은 미국장로교 제170회 총회를 위해 피츠버그에 모였다.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북미 연합 장로교는 제100회 총회를 기념하고 있었다.  

이는 두 교단에 마지막 총회가 되었다. 바로 다음 날인 5월 28일 두 그룹은 중대한 행사를 위해 힘을 합쳤기 때문이다. 이는 새로 설립된 미국연합 장로교회 최초의 총회였다. 

북미 연합 장로 교회 (UPCNA) 및 미국장로교 (PCUSA)의 통합은 역사적이며 기록적인 일이었다  이 통합으로 교인 수는 3백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새롭게 창립된 연합 미국장로교(UPCUSA)를 세계 최대의 장로교 교단으로 만들었다. 

이에 앞서, UPCNA에는 총서기인 새뮤엘 W. 셰인 박사의 지도하에 약 250,000명의 교인이 있었다. UPCNA는 1858년에 스코틀랜드 교단과 연계되었던 두 교단인 장로교 연합회와 개혁 장로교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PCUSA는 그 당시 2백만 명이 훨씬 넘는 교인 수를 가진 교단으로 훨씬 더 큰 규모였다. PCUSA는 UPCNA보다 거의 70년 일찍 설립되었다. 이는 1789년에 설립된 미국 최초의 장로교 교단이었다. 1958년 서기였던 유진 칼슨 블레이크 박사는 이 새로운 통합에 대해 열정적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기 위해 더 강력한 교회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전에 전국 교회 협의회의 회장을 역임한 블레이크 박사는 에큐메니시즘을 교회 사역을 강화하기 위한 우선순위로 보았다. 

과거에 UPCNA 지도자들은 다른 개혁 교회들과의 통합을 고려했지만,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던 이 교단에는 성공 사례가 없었다. 1958년 통합에 이르렀을 때조차, 모든 UPCNA 교회와 노회가 미국장로교에 가입한다는 생각에 기뻐했던 것은 아니었다. 1년 전인 제99회 총회에서 총회 대의원 중 57%만이 통합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다수의 결정으로 미합중국에 새로운 연합 장로교를 세우는 과정을 시작했다. 

연합을 기대하면서 두 교단은 최종 집회를 위해 의도적으로 피츠버그에서 만났다. UPCNA는 6차 연합 교회에 모였고, 로버트 N.목사가 총회장을 맡았다. PCUSA는 이스트 리버티 교회에서 해럴드 R. 마틴 목사를 총회장으로 총회를 열었다. 

UPCNA는 100주년 총회를 거행하고 여선교회 창립 75주년을 기념했다. 이 회의에서 조지 W. 포사이스 뉴욕 장로는 교인의 3분의 2가 찬성표를 던지면 교회가 합병을 거부하고 교단을 탈퇴할 수 있는 결의안을 제시했다. 6개 교회가 철회를 청원했지만, 결국 50명 이하의 작은 뉴욕 교회만이 독립을 인정받았다. 1개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역사적인 연합을 지지하게 한 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불과 1년 전에는 43%의 총회 대의원들이 이에 반대했었다. 

두 총회장 간의 상징적인 악수로 미국장로교 연합은 9,400개 이상의 교회를 자랑하는 거대한 교단이 되었다. 첫 총회에서, 블레이크 박사는 새로운 그룹의 서기로 선출되었고, UPCNA의 서기였던 셰인 박사는 총회 부서기의 역할을 맡았다.  

티오필러스 M. 테일러 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피츠버그-제니아 신학교의 교수이자 은퇴한 UPCNA 선교사인 테일러 목사는 이전의 두 교회 모두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총회 무대에서 테일러 의장이 두 개의 켈트 십자가를 함께 들었던 것은 두 교단이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세 번째 십자가 - 미합중국 장로교(PCUS) - 도 합류하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 규모의 합병은 신중한 계획과 함께 이루어졌다. 두 그룹의 대표 40명으로 구성된 통합 특별위원회는 이사회, 교단 본부 및 중간 공의회를 병합하는 방법에 대한 권고안을 작성하는 힘든 작업을 맡았다. 연합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 특별위원회는 실행계획을 검토하며 함께 일했다.  

그들의 최종 계획은 연금국, 전국 선교이사회, 기독교 교육위원회의 완전한 통합으로 이어졌다. 또한 두 개의 피츠버그 신학교-피츠버그 - 제니아 신학교 (UPCNA)와 서부 신학교 (PCUSA) - 가 합병되어 피츠버그 신학교 형성했다. 

통합에 따른 또 다른 큰 변화는 각 기관의 해외 선교부가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기관은 에큐메니칼 선교 및 관계 위원회를 만들기 위해 개혁되고 세 개의 교회간 위원회와 혼합되었다. 이와 같은 변형으로 인해 UPCUSA는 미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 중 처음으로 외국 선교 사역보다는 교회간 사역을 받아 들였다. 

1958년 5월의 그 특별한 날, 새로운 교단이 종교적인 세계와 세속적인 세계에 더 큰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 설립된 UPCUSA의 첫 회의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낙관과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블레이크 박사의 지도하에 UPCUSA는 1967 신앙고백 낳은 에큐메니컬 시민권 운동을 위한 사역의 시대에 들어섰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UPCUSA 내에서 의견 불일치가 생겨 이후 몇 년 동안 일부 교회가 교단을 떠났다. 그러나 1958년 통합이 이룬 업적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1983년, 미합중국 장로교 (PCUS)와의 역사적인 재통합을 위한 길을 열었다.   

Procession with the three denominational banners on Bigelow Boulevard in Pittsburgh.

피츠버그의 비글로우 블루바드 (Bigelow Boulevard)에서 세 개 교단의 배너와 함께 행진.  

UPCUSA의이 역사적인 회의를 엿보기 위해, 장로교 역사 협회의 디지털 저장소인 Pearl에서 이미지를 있다. 총회 대의원들을 위한 아침 식사 자리에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 연설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 기사는 장로교 역사 협회의 블로그 게시물로 처음 등장했다. https://www.history.pcusa.org/blog/2022/02/stories-ga-1958-union-pcusa-and-upcna